서론: 잃어버린 정체성, 하나님의 책에서 발견하다
"역대상 1장에는 250여 개의 이름이 빼곡히 채워져 있습니다. 창세기의 아담부터 시작해 노아의 홍수, 아브라함의 부르심을 거쳐 에돔 왕국에 이르기까지, 이 족보는 마치 고대 세계의 지도처럼 펼쳐집니다. 그러나 이 이름들의 나열은 단순한 역사 기록이 아닙니다. 포로 생활에서 막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족보는 '너희는 여전히 언약의 백성'이라는 선포였습니다. 바벨론의 강제 이주로 민족의 정체성이 산산조각난 그들에게, 저자는 아담의 창조부터 시작해 하나님께서 직접 이끄신 구속사의 궤적을 보여주며 '너희는 우연히 존재하는 자들이 아니라 영원한 계획 속에 새겨진 선택받은 민족'임을 선언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수많은 '닉네임'으로 자신을 정의합니다. SNS 프로필에는 직장·학벌·취미가 빼곡히 채워지지만, 정작 '나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 앞에서 허탈함을 느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족보를 통해 '야웨의 자녀'라는 이름을 되찾았듯,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신분'(고후 5:17)이라는 진정한 이름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 족보는 단순한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창조주께서 당신의 손길로 써내려가신 영적 DNA의 계보입니다.
이스라엘의 족보가 아브라함이 아닌 아담에서 시작하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인류 전체가 한 조상에게서 나왔음을 보여주며(행 17:26), 동시에 아담의 타락으로 시작된 인류의 비극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해 구원의 길을 열어가셨음을 드러냅니다. 70년간 포로 생활로 신앙의 뿌리가 흔들리던 이스라엘은 이 족보를 통해 '우리는 창조주께서 직접 심으신 포도나무'(시 80:8-9)임을 재발견했습니다. 마치 성도들이 세례를 통해 '옛 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사람으로 태어남'(롬 6:4)을 선포받듯이 말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의 족보는 세 가지 신학적 초점을 갖습니다. 첫째, 선택의 원리입니다. 가인의 계보가 의도적으로 생략되고 셋의 계열만 강조된 것은(창 5:3-32),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보여줍니다. 둘째, 언약의 연속성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창 12:1-3)이 이삭→야곱→유다 지파로 이어지며, 결국 다윗 왕조를 거쳐 메시아 예수님께까지 연결됩니다(마 1:1-17). 셋째, 보편적 구원입니다. 이방 민족인 에돔 왕들의 기록(43-54절)은 하나님의 통치가 모든 민족에게 미치며, 궁극적으로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계 5:9) 구원받을 자들을 예시합니다.
이 모든 기록의 종착점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창조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3:29)고 선포했습니다. 오늘 이 족보를 읽는 우리는 단순히 옛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주께서 당신의 책에 우리 이름을 새기시고(눅 10:20),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으로 부르신 놀라운 현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전환질문: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참된 정체성을 발견하고, 이 뿌리 위에 굳건히 설 수 있을까요?
첫째, 역사의 시작점은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창조주께서 당신을 지으셨습니다."
역대상 1장 1-4절은 아담에서 노아까지 열 번째 세대를 단 세 줄로 압축합니다. "아담,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야렛, 에녹, 므두셀라, 라멕, 노아." 이 간결한 기록 속에는 인류 역사의 시작을 관통하는 두 가지 핵심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사실, 둘째, 타락한 세계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족보에서 주목할 점은 창세기 5장의 원형을 그대로 따르면서도 의도적으로 생략된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 홍수 전 타락한 자들의 방황, 니므롯 같은 영웅들의 업적은 모두 배제되었습니다. 대신 '셋'의 계보만을 강조함으로써, 역대기 기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의 계열이 인류 역사의 진정한 주류임을 선언합니다. 에녹이 365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들림받은 것처럼(창 5:24), 이 계보는 인간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지속되는 생명의 흐름을 보여줍니다.
이 선택적 기록에는 놀라운 신학적 메시지가 숨겨져 있습니다. 아담의 타락(창 3장)으로 인해 모든 인류가 죄의 종이 되었지만, 하나님은 셋의 혈통을 통해 구속사의 실을 잇기 시작하셨습니다. 이는 인간의 노력이나 도덕적 우월성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으로 구원이 진행됨을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18세기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타락한 인류 가운데서 한 무리를 선택해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스러운 자비를 나타내시는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이 열 대의 계보는 숫자 '10'이 지닌 상징성을 통해 하나님의 완전한 주권을 암시합니다. 창세기 1장의 열 번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가 우주를 완성했듯, 열 세대의 계보는 인류 역사가 하나님의 계획대로 완성될 것을 예표합니다.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창 6-9장)조차도 이 계보를 끊지 못했습니다. 방주 안에 보존된 여덟 명의 생명이(벧전 3:20) 인류의 새로운 시작이 되었던 것처럼,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도 "새로운 피조물"로 역사의 흐름을 잇고 있습니다.
이 진리는 현대인에게 깊은 위로를 줍니다. 수많은 이름 중 그 어느 것도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지만, 각 이름은 하나님의 손길로 기록된 생명의 한 페이지입니다. 4세기 교부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은 모든 시대를 동시에 보시며, 각 시대의 사람들을 당신의 영원한 계획에 맞게 배열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출생과 삶의 모든 순간도 이 영원한 계획의 일부입니다. 세상이 당신을 번호나 통계로 취급해도, 창조주의 책에는 당신의 호흡 하나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시 56:8).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렘 1:5). 이 약속은 아담의 계보에 이름을 올린 모든 이들에게 해당됩니다. 에녹의 동행, 노아의 방주 건조, 아브라함의 부르심—이 모든 사건은 인간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 움직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도(요 15:16) 이 영원한 계획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당신의 인생이 작고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그것은 영원 전부터 준비된 하나님 나라 건설의 한 조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생활 중에 이 족보를 읽을 때, 그들은 한 가지 확신을 얻었습니다. '우리의 뿌리는 바벨론의 노예가 아니라 창조주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왕 같은 제사장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삶의 혼란 속에서 이 진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직장에서의 실패, 관계의 상처, 건강의 악화—이 모든 것 위에 "하나님의 자녀"(요일 3:1)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이름은 세상이 주는 어떤 낙인도 지울 수 없는 영원한 신분입니다.
둘째, 선택의 분기점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그 음성이 오늘도 당신을 부르십니다."
역대상 1장 24-27절은 갑작스럽게 셈의 계보에서 아브라함이 등장하는 순간을 포착합니다. "셈, 아르박삿, 셀라, 에벨, 벨렉, 르우, 스룩, 나홀, 데라, 아브람(곧 아브라함)." 이 열 번째 이름의 등장은 인류 역사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바꾼 사건입니다. 갈대아 우르의 평범한 장정 아브람에게 들려온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창 12:1)는 명령은, 인간의 계획을 초월한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을 보여줍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갈림길(34절)은 단순한 가족사가 아니라 은혜로 시작된 구속사가 인간의 불신을 이겨내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이삭의 출생은 자연법칙을 초월한 기적입니다. 90세의 사라와 100세의 아브라함에게서 약속의 아들이 태어난 것은(창 21:5), 인간의 생물학적 한계를 부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증명합니다. 반면 이스마엘은 사라의 제안으로 종 하갈을 통해 낳은 아들로(창 16:2), 인간의 조급함이 빚어낸 결과물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두 아들을 "육신을 따라 난 자"와 "약속을 따라 난 자"(갈 4:23)로 대비시키며, 신자들이 "자유로운 여인의 자녀"(갈 4:31)임을 선언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육신의 노력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확증하는 진리입니다.
아브라함의 부르심에는 세 가지 신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무조건적인 선택입니다. 그가 우상숭배자 데라의 아들이었음에도(수 24:2), 하나님은 아무런 자격 조건 없이 그를 부르셨습니다. 둘째, 목적 지향적 부르심입니다. "네게 복을 주리니...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으리라"(창 12:2-3)는 선언은 개인적 축복을 넘어 인류 구원의 청사진을 보여줍니다. 셋째, 신실한 인도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실패(애굽 하선, 하갈 사건)로 점철되었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그를 붙드셨습니다(창 15:1).
이 진리는 현대 신자들에게 깊은 위로를 전합니다. 한 목회자는 "우리의 믿음이 완벽하지 않아도, 하나님의 약속은 흔들리지 않는다"고 강조했습니다. 아브라함이 25년간 기다리며(창 12:4; 21:5) 약속을 의심할 때도(창 17:17), 하나님은 여전히 "내 언약을 세우리라"(창 17:19)고 선언하셨습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가 기도에 답이 늦어져 낙담할 때, 성령께서 "깊은 탄식으로 말씀하신다"(롬 8:26)는 약속처럼 말입니다.
"너희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선택하였고"(요 15:16). 이 말씀은 모든 신앙의 출발점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선포합니다. 직장에서의 성공, 학벌, 재산 등 세상의 기준으로 자신을 정의하려는 유혹 속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좇아 가는 자들"(롬 4:12)의 계보에 합류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이 진리를 '오직 은혜'(Sola Gratia)로 요약하며, 인간의 공로를 완전히 배격했습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의 이야기는 오늘날 교회 안에도 반복됩니다. 어떤 이는 조직의 규모나 프로그램으로 성장을 추구하고(이스마엘), 어떤 이는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며(이삭)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니다. 역대기 기자가 이스마엘의 12족장(29-31절)을 기록하면서도 "약속의 아들" 이삭을 강조한 것은 분명한 메시지입니다. 인간의 계획은 잠깐 빛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히 설립됩니다.
이 진리는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됩니다. 부모는 자녀의 미래를 위해 조바심하기 전에, 하나님이 그 생명을 지으신 목적을 찾아야 합니다(시 127:3). 청년들은 취업·결혼의 압박 속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심의 소망"(엡 1:18)을 붙잡아야 합니다. 장년들은 인생의 후반부를 "내가 네게 명한 것을 굳게 지키라"(수 1:7)는 말씀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75세에 부르심을 받고 175세까지 하나님과 동행한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시작과 끝이 오직 은혜입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벧전 2:9). 이 선언은 역대상 1장의 족보가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새 언약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심으로(마 1:1) 절정에 이르렀고, 이제 그분을 믿는 모든 이들이 "아브라함의 자손"(갈 3:29)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하늘 생명책에 기록된 것(눅 10:20)은, 이 영원한 계보에 동참했음을 의미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실패자로 낙인찍어도, 창조주의 책에는 '약속의 후손'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셋째, 미래의 희망점은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에돔 왕조는 사라졌지만, 메시아의 왕국은 영원합니다."
역대상 1장 43-54절은 이스라엘보다 먼저 왕정을 시작한 에돔의 8명의 왕들을 열거합니다. "벨라, 요밥, 후삼, 하닷, 삼라, 사울, 바알하난, 하닷." 이 이름들은 역사책에서 잊혀진 왕들이지만,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의 쌍둥이 형제 에서의 후손으로(창 36:1), 끊임없는 적대관계였습니다(민 20:14-21). 그러나 역대기 기자는 이들의 왕들을 공정히 기록하며 두 가지 진리를 선포합니다. 첫째, 모든 민족의 흥망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 둘째, 인간의 권세는 잠시지만 메시아의 통치는 영원함입니다.
에돔의 첫 왕 벨라는 "딘하바"에서 통치했습니다(43절). 이 도시 이름은 '심판의 계곡'을 의미하며, 그의 통치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 앞에 무너질 운명임을 암시합니다. 반면 다윗의 왕조는 비록 바벨론 포로로 단절된 것처럼 보였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눅 1:33)는 약속이 성취되었습니다. 이는 인간의 정치적 성공이 아닌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구속사가 진행됨을 보여줍니다. 8명의 에돔 왕 중 마지막 하닷은 "바세렛 사람 마드렛의 딸 므헤다벨과 혼인했다"고 기록됩니다(50절). 이 세부사항은 에돔 왕조가 혈통과 결혼 동맹으로 권력을 유지하려 했음을 보여주지만, 결국 그 모든 노력은 역사의 먼지가 되었습니다.
이 대조는 오늘날 신자들에게 결정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의 희망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 현대인들은 권력·재물·명예를 추구하며 에돔 왕들처럼 '영원한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이 세상과 그 정욕은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리라"(요일 2:17)고 경고합니다. 19세기 설교가 찰스 스펄전은 "세상의 모든 왕관은 흙으로 만들었지만, 그리스도의 왕관은 하늘의 별들로 장식되었다"고 선언했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하나님의 보편적 주권을 강조합니다. 에돔은 이방 민족이지만, 그들의 흥망까지도 하나님의 역사 안에 기록되었습니다. 이는 요나서의 니느웨 회개나(욘 3:5-10) 고넬료의 가정에 성령이 임한 사건(행 10:44-48)처럼, 하나님의 구원이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음을 예시합니다. 에돔 왕들의 리스트 끝에 "이는 에돔 족장들이라"는 결론(54절)은, 이방인이라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역할을 감당했음을 보여줍니다.
이 진리는 교회의 사명을 재확인시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땅의 소금이니"(마 5: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이 상하지 않으려면 주변을 풍성히 감싸야 하듯, 신자들은 에돔 같은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한 선교사는 중동의 무슬림 마을에서 "당신의 조상 에서는 야곱의 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전하며 복음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처럼 역대상의 족보는 모든 민족 구원의 청사진을 암시합니다.
"내가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부르리라"(롬 9:25). 이 약속은 에돔 왕들의 계보를 기록한 역대기 기자의 의도와 맞닿아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한 민족을 선택하셨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땅의 모든 족속"(창 12:3)을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오순절에 각 나라에서 모인 무리들이 성령을 받은 사건(행 2:5-11)은 이 약속의 성취였으며, 오늘날 교회는 이 사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에돔 왕들의 흥망성쇠는 우리에게 세상을 바라보는 영적인 안경을 제공합니다. 주식 시장의 등락, 정치적 변동, 사회적 유행—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재림 앞에서는 "그 그림자"(골 2:17)에 불과합니다. 20세기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최후의 심판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성공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얼마나 신뢰했는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역대상 1장의 족보는 이 진리를 역사의 페이지에 새깁니다.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시 145:13). 이 선언을 믿을 때, 우리는 에돔 왕들의 허망한 영광보다 다윗의 자손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게 됩니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실패로 보였던 십자가 죽음이, 실제로는 사탄의 머리를 깨트린(창 3:15) 영원한 승리였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한 고난도 이 영원한 관점에서 재해석되어야 합니다. 한 신자가 암 선고를 받고 "주님, 이 병을 치유하시든지, 치유하지 않으시든지, 저는 주의 계획을 신뢰합니다"라고 고백한 것처럼,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결론: 영원한 이름으로 새겨진 당신의 이야기
"역대상 1장의 마지막 이름인 '하닷'이 역사의 먼지 속으로 사라진 지 수천 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이 방대한 족보의 종착역은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마태복음 1장이 역대상의 족보를 이어받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마 1:1)로 시작하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 이야기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시작을 맞이했습니다. 포로 귀환민들이 족보를 통해 '우리는 여전히 언약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회복했듯이, 오늘날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창조'(고후 5:17)로 태어난 자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의 노예에서 해방될 때, 그들은 두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과연 우리가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될 수 있을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신가?' 역대상의 족보는 이 물음에 대한 확실한 답변입니다. 아담의 창조로 시작해 아브라함의 부르심을 거쳐 다윗 왕조로 이어지는 계보는,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결코 좌절되지 않음을 입증합니다. 마치 홍해를 가르신 손이 오늘도 우리의 인생을 인도하시듯,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셔서 일하고 계십니다.
이 진리는 우리의 일상에 혁명을 일으킵니다. 직장에서 상사가 당신을 번호로 부르더라도, 학교에서 친구들이 별명으로 놀리더라도, 병원에서 차트 번호로 불리더라도—하나님은 당신을 '내가 사랑하는 자'(엡 5:1)로 부르십니다. 19세기 흑인 노예들이 목에 달린 번호판을 보며 절망할 때, 그들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 진짜 이름은 하늘 책에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도 이 확신으로 살아갈 때, 세상의 낙인을 이겨내는 영적 힘을 얻습니다.
"내가 너를 영원한 이름으로 부르리니"(사 62:2). 이 약속은 역대상의 족보에 이름을 올린 모든 이들에게 이루어졌으며,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당신의 이름이 천국 생명책에 기록된 것은(눅 10:20) 단순한 구원의 확인이 아닙니다. 그것은 창조주께서 당신을 영원한 계획의 일부로 삼으셨다는 선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잃어버린 영광을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받은 우리는(롬 5:17), 이제 '하나님의 걸작품'(엡 2:10)으로서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족보를 통해 공동체 정체성을 회복했듯이, 현대 교회도 매 주일 예배에서 이 진리를 재확인해야 합니다. 성찬식 때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몫이니"(눅 22:19)라는 선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맺은 새 언약 공동체임을 상기시킵니다. 한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이렇게 도전했습니다. "당신의 출생 증명서는 병원에서 발급되었지만, 영적 신분증은 십자가에서 발급되었습니다. 그것을 잊지 마십시오."
역대상 1장의 족보는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아담의 계보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심으로(요 1:14) 절정에 이르렀고, 이제 우리는 그분의 부활로 말미암아 '다시 태어난'(요 3:3)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진리를 붙잡을 때, 우리는 에돔 왕들의 허망한 영광을 좇지 않고, "본향을 사모하는"(히 11:16) 순례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황무지 같은 현실 속에서도,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는 '새로운 창조'의 씨앗입니다(갈 6:15).
"창조주이시며 우리 아버지 되신 하나님, 이름 모를 수많은 인생들 속에서 저를 부르신 은혜 감사합니다.
세상의 눈물과 상처를 겪을 때마다, 주님의 책에 제 이름이 금으로 새겨져 있음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약속의 후손 예수님을 본받아, 뿌리 깊은 신앙으로 주님의 계획을 이루는 자녀가 되게 하시고,
이 땅에서 주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게 하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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