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3장 1-11절]
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https://www.youtube.com/live/jYPSGYh4eRA?si=80wgllguu-V6984o
서론
오늘 말씀의 제목입니다. “예수를 얻기 위하여”
우리는 계속해서 말씀을 묵상해가고 있습니다. 지난주까지 에스더를 통해서 보이지 않지만, 역사 위에 일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끝내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에스더를 통해 묵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지난 금요일부터는 빌립보서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를 통해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을 발견하셨는지요?
저는 빌립보서 큐티하면서 뭔가 사자성어로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3일 금요일 빌립보서 1:1-11 옥중지희 옥중에서도 기뻐하다.
24일 토요일 빌립보서 1:12-26 생사역설 삶과 죽음의 역설 (내가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21절)
25일 주일 빌립보서 1:27-2:4 성도일체 성도는 어떻게 하나가 되는가?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 한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라)
26일 월요일 빌립보서 2:5-18 야소포심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27일 화요일은 빌립보서 2:19-30 디모데와 에바브로 디도와 같은 귀한 동역자들이 있었죠. (찐동역자)
(다시 보니까 별거 아닌데, 매일매일은 내가 천재인줄 알았어요.)
오늘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지식기독
내일은 하늘 시민 다운 삶 천국시민
모레는 복음대로 살라 복음생활
토요일 마무리는 자족비결
요렇게 사자성어로 빌립보서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여러분 점점 메말라 가는거 알아요? 이제 나한테 안웃어줘.)
여러분 오늘은 빌립보서의 딱 중간인데요. 이 본문을 펼치기 전에 한 가지 상상을 해보면 좋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인생의 가장 어두운 시기에, 그것도 자유가 박탈된 감옥에서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야 한다면, 과연 어떤 내용을 담으시겠습니까?
아마도 억울함, 분노, 두려움, 외로움, 혹은 누군가에 대한 원망에 대해 글을 쓰지 않을까요?
그런데 로마의 감옥에서 빌립보교회를 향해 보내진 이 편지에는 절망이나 원망의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갇혀있으면서 밖에서 자유로운 이들을 향해 반복해서 “기뻐하라”로 명령합니다. 빌립보서 전체에서 기뻐하라는 단어가 무려 17번이나 등장합니다. 그래서 이 서신은 기쁨의 서신이라고 불렸습니다.
어떻게 바울은 감옥에서 기뻐할 수 있었던걸까요? 여러분, 감옥에서 기쁨을 노래할 수 있다면, 그 기쁨은 결코 환경이나 조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바울의 기쁨은 세상이 주는 일시적인 쾌락이나 성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그의 기쁨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히고, 자유와 명예도 다 빼앗겼지만, 단 한 가지를 얻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가 바울을 자유롭게 했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힘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 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오늘 어떤 삶을 살고 계십니까? 혹시 사도바울과 같이 계획했던 모든 일들이 좌절되었습니까? 기본적인 자유마저 억압받을 정도로 궁핍하고 괴로운 하루를 사셨습니까? 사방이 다 막힌것 같은 괴로운 하루를 보내셨습니까?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뻐할 것 하나 없는 우리의 인생이 오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기쁨으로 충만한 삶으로 변화되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우리는 바울이 감옥에서 써 내려간 이 기쁨의 편지를 통해,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얻고,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지, 그 비밀을 함께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전환 질문: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첫째, 주 안에서 기뻐해 합니다. (빌립보서 3:1-3)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오늘 본문 1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바울은 이미 1장과 2장에서 여러 차례 ‘기뻐하라’고 권면했습니다. 1장에서는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기뻐한다고 고백합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18).
2장에서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서로를 섬기며,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며, 에바브로디도와 디모데 같은 동역자들을 기쁨의 모델로 제시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2:18).
그리고 3장에 들어서면서 바울은 다시 한 번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여기서 ‘기뻐하라’는 말은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명령형 동사입니다.
기뻐해야만 한다. 너는 기쁘고야 말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기쁨은 명령입니다. 그날의 상황과 감정에 기쁨을 흥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 보지 말고 주 안에서 기쁨을 선택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기쁠 것입니다. 기쁨이 충만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는 기쁨이 가득할 것입니다. 아멘
바울이 감옥에서 기뻐할 것이 무엇이 있었을까요? 가진 것은 다 빼앗겼는데요.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 있어 그는 기쁩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 주님이 그곳에 계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주님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바울은 이어서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고 말합니다. 반복해서 기쁨을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가 쉽게 기쁨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으려 하고, 사탄은 우리의 마음에 불평과 원망, 절망을 심으려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반복해서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명령은 우리를 지키는 안전장치입니다. 기쁨을 잃지 않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안전지대입니다.
옆 사람을 바라보고 이렇게 말씀해 주십시오. “주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기뻐해야만 한다” (그런표정으로?!) (웃어? 같은?!)
바울은 곧바로 2절과 3절에서 기뻐하기 위해서 이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2-3절 함께 읽겠습니다.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2절과 3절은 꼭 함께 해석해야 합니다. 2절과 3절은 서로를 보완하고 있거든요. 2절에는 하지 말아야 할 것 3가지, 3절에는 해야 할 것 3가지가 서로 대조되고 있습니다.
먼저 무엇이 서로 대조되고 있습니까?
개들 vs 성령으로 봉사하는 것
행악하는 자 vs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는 것
몸을 상해하는 일 vs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
개들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는 것이 대조됩니다.
행악하는 자와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는 것이 대조됩니다.
몸을 상해하는 일과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이 대조됩니다.
여러분 이 두가지의 사이에는 한가지 차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쁨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는 것은 기쁨이 됩니다. 그러나 똑같이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더라도 기쁨이 없으면 그것은 개들과 같습니다.
개는 무엇입니까? 당시 문화에서 개는 기피하는 짐승이었습니다. 개는 먹을 것을 주는 사람에게 꼬리를 흔듭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면 으르렁 거립니다. 개들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분주하지만 기쁨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행악자와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사람으로 나뉩니다. 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기쁨입니다.
삶을 살아가며 나에게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은 기쁨입니다. 기쁨을 가진 사람만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쁨이 없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을 위해 일합니다. 그것을 성경은 행악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사람들을 평가하는 나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주된 관심은 너 할례 받았어? 나는 선택받은 백성이라서 피까지 흘렸어.
이것을 자랑합니다. 그런데 기쁨이 충만한 자들은 할례를 받았던 받지 않았던 그것에 차별을 두지 않습니다.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것, 용납할 수 없는 자를 용납하고, 사랑할 수 없는자를 사랑하는 것, 기쁨이 충만한 자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삶을 포개 놓아봅시다.
우리가 예배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고행입니까? 기쁨입니까?
우리가 목자를 하고, 마을장으로 섬기고, 캠장으로 엘더로, 교역자로, 국내선교로, 해외선교로, 복음전도자로 섬기는 것은
강아지처럼 행악자처럼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함은 아닙니까? 할례 받은자처럼 인정욕에 가득차서, 이것봐라. 내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봐라. 너희는 이거 못하지? 트로피만 수집하는 ‘기쁨 없는 섬김’은 아닙니까?
또는 기쁜 척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그래도 목자인데, 마을장인데, 기뻐야지. 진정한 기쁨 없이 기쁨의 가면을 쓰고 살고 있진 않습니까? 기쁨이 없는 삶을 당연하게 여고 있진 않습니까?
여러분만 아는 여러분의 원래 표정, 디폴트 표정은 웃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예배합니까? 그것이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왜 봉사합니까? 왜 사역합니까? 왜 교회에 머뭅니까? 왜 거부 당하면서도 전도합니까? 그것이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이 우리가 예수를 얻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기쁨의 여부가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얻었는지, 그분 안에 있는지 판가름하는 기준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라!”
이것은 감정이 아니라, 결단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셨기에,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가정에, 교회에, 이 기쁨이 다시 회복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얻은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기쁨이 여러분 모두에게 충만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둘째, 주를 위해 버리고 얻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3:4-9)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은 이제 자신의 과거와 신앙의 전환을 매우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이 한때 얼마나 많은 세상적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상세히 설명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4-6절 함께 읽겠습니다.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이 짧은 구절에는 바울의 과거 자랑거리가 일곱 가지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것 – 율법을 철저히 지킨 가문에서 태어난 정통 유대인이라는 의미입니다.
- 이스라엘 족속 – 순수한 혈통,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자부심입니다.
- 베냐민 지파 – 이스라엘 12지파 중에서도 명문, 사울 왕이 속했던 지파이기도 합니다.
-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 언어와 문화, 전통 모두에서 순수성을 자랑합니다.
- 율법으로는 바리새인 – 가장 엄격한 종교적 규율과 신앙적 열심을 가진 계층입니다.
-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 – 자신의 신념을 위해 행동하는 열정의 사람이었습니다.
-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 – 외적으로 보기에 흠 잡을 데 없는 종교적 삶을 살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최고의 자랑거리였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나는 모태신앙입니다. 우리 집안은 3대째 장로 집안이고, 공부를 아주 잘했고, 명문대 출신이며, 교회 창립 멤버이고, 부모님이 장로와 권사입니다. 나는 목자를 10년째 하고 있지요. 매일 큐티도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7-8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여기서 ‘배설물’(헬라어 ‘스퀴발라’)은 쓰레기, 오물, 쓸모없는 찌꺼기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과거에 자랑하던 모든 것, 세상적으로 자랑할 만한 모든 배경과 업적, 신앙적 열심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얻는 데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고백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속에는 예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어떤 것들이 내 인생이 하나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증거가 가득하다 할지라도, 예수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얻는데 방해가 된다면 다 버려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진정한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아는 지식, 곧 그분과의 인격적 만남, 그분의 사랑과 은혜, 십자가의 복음을 경험한 후에는 그 어떤 세상의 영광도, 업적도, 자랑도 모두 무가치하게 느껴졌습니다.
우리도 이것 알지 않습니까? 여러분에게 진정한 사랑이 찾아왔을 때, 전여친과 주고 받은 문자, 함께 찍은 사진 버려요. 안버려요.
버려요. 왜요? 이전에는 그것이 자랑이었지만, 진정한 사랑을 만나고 나면 그 전의 모든 것은 다 해로 여깁니다. 무용하죠.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바울의 이 고백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종종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 배경과 조건, 교회에서의 위치, 봉사의 양, 신앙의 연륜을 자랑하고 싶어집니다. “나는 모태신앙이다”, “나는 교회에서 오래 봉사했다”, “우리 집안은 신앙의 명문이다”라는 생각이 우리 안에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이만하면 되었다 싶을 때가 있습니다. 나를 자랑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을 얻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 나는 그것들을 모두 배설물로 여긴다.”
나는 다 버릴 것이다. 다 잃어버릴 것이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라면 그렇게 할 것이다.
여러분 이것이 바울이 감옥속에서도 기뻐하는 비결이었습니다.
그리고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다 버린 나는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를 원합니다.
나는 보잘것 없지만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에 하나님이 나를 의롭다 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이 믿음의 결단이 필요합니다.
내가 쌓아온 신앙의 경력, 세상의 자랑거리, 내 능력과 배경,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기쁨은 내가 가진 것, 내가 이룬 것, 내가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얻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이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얻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셋째 주와 함께 부활을 살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3:10-11)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사랑하는 여러분, 바울의 고백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자신의 모든 자랑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믿음으로 주님을 붙든다고 말한 후, 이제 그리스도와의 더 깊은 연합을 갈망합니다. 바로 그것이 10절과 11절에 담긴 바울의 간절한 소망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세 가지를 강조합니다.
첫째,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을 알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부활에 이르려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바울이 말하는 ‘알고자 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하고 체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제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이 자신의 삶 속에 실제로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부활의 권능은 죽음을 이긴 생명의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단지 먼 미래의 부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죄와 절망, 두려움과 무기력, 상실과 아픔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둘째, 바울은 “그 고난에 참여한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는 반드시 고난이 따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고난을 피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예수님과 더 깊은 연합을 이루고자 합니다. 고난은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동시에 우리를 정결하게 하고, 예수님과 더 가까워지게 합니다. 바울은 고난 속에서 오히려 기쁨을 발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이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특권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셋째, 바울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어떻게 해서든지’라는 표현은 바울의 간절함과 집념을 보여줍니다. 그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본받아, 자신의 옛사람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 박고,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마지막 날, 예수님과 함께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하기를 기대합니다.
여러분, 진정한 기쁨을 아는 사람은 남들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세상의 기쁨은 상황에 따라 흔들리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기쁨은 고난과 죽음조차도 이기는 기쁨입니다. 바울은 고난을 피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고난 속에서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더욱 깊이 경험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예상치 못한 고난과 시련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이 고난 속에서도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경험하게 하소서. 나의 옛사람이 죽고, 주님과 함께 새 생명으로 살아가게 하소서.”
바울은 고난과 죽음조차 기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끝에 부활의 영광, 영원한 생명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고난을 두려워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고난 속에서 오히려 기쁨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이 우리를 예수님과 더 가까이 이끌고, 결국은 영원한 부활의 영광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한 기쁨은 고난과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소망에서 나옵니다. 오늘 우리도 바울처럼,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과 함께 부활에 이르기를 소망하며, 고난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결론
둘째 아이는 저와 끝말잇기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이와 눈을 마주치고 아이가 알고 있는 단어들을 함께 살피는 것은 저에게 큰 기쁨입니다.
그런데요. 어제 둘째 연준이랑 끝말잇기를 하다가 저는 뭔가 참 좋았습니다. 아이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전기! 기쁨, 연기! 기쁨, 동기! 기쁨!
제가 기로 끝나는 단어를 이야기 하면 연준이는 큰소리로 이렇게 외칩니다. “기쁨!” 기쁨이면 다이겨! 기쁨이 다 이겨!
기쁨이면 다 이겨
사도바울이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이 꼭 알았으면 하는 것, 절대 잊지 않았으면 하는 것
여러분 오늘의 결론입니다. 기쁨이 다 이겨. 감옥에 있어도 기쁨이 이겨. 많이 가졌든 버릴게 많든 상관없이 기쁨이 이겨. 죽음도 두렵지 않아. 기쁨이 이겨.
예수를 얻기 위하여 주안에서 기뻐하십시오. 권유가 아닌 명령임을 기억하고, 감정과 상황이 아닌, 오직 주님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를 얻기 위하여 자랑하던 것을 다 버리고 예수를 얻으십시오. 진정한 기쁨은 내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붙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와 함께 부활에 이르십시오. 우리의 삶에 고난과 시련, 심지어 죽음의 위기가 찾아온다 할지라도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기억하고,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결단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은 다릅니다.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어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예수로 기뻐합시다. 주로 인해 버리고 얻읍시다. 주와 함께 부활에 이릅시다. 그리스도를 얻는 삶, 그 안에 있는 기쁨이 여러분의 삶을 가득 채우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주님 캄캄한 감옥에서, 아무도 내게 말 걸어주지 않는 그곳에서,
아무것도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그곳에서도
사도바울이 기뻐하고 있음을 우리가 나누었습니다.
동일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주여 오늘 감옥같은 하루를 살고 있는 청년들의 오늘이, 삶이,
기쁨이 가득한 삶으로 변화되도록 오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좋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다 버리기를 결단하였습니다.
기쁨의 근원되시는 주님을 얻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가면을 쓴것 같은 순간들이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주여 진정으로 찬양하고 경배하게 하시고,
우리의 모든 헌신이 기쁨으로 시작되고, 기쁨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을 위해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을 기꺼이 가기로 결단합니다.
주여 그 너머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잊지 않게 하시고, 오
늘도 주님과 닮아가는 기쁨으로 마침내 영원한 천국에 이르게 하옵소서.
믿고 감사드리며 사랑 많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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